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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

대구야.../대구는 | 2009/02/25 16:30 | Posted by 오이군(꼬마미르)
달성공원의 유래
대구는 신라때 달구화현(達句火縣)이라 불렀으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742∼765재위)때에 이르러 비로소 대구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달성의 옛이름은 이 달구화(達句火) 달불성 (達弗城)에서 유래된 것이다. 달성은 경주의 월성(月城)처럼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한 것이 특징이다. 달성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그들의 생활근거지에 쌓은 성곽(城廓) 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벽의 아래층에는 조개무지 유적이 있고 목책(木柵)의 흔적도 있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발달사상 가장 이른시기에 나타난 형식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점해왕(沾解王) 15년(261)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극종(奈麻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 합병된 뒤에는 군사요지로 중시되었으며 그 후 고려 공양왕 2년(1390) 토성에 석축을 더했다. 조선조 선조29년 (1596)에 석축을 더하고 경상감영을 이곳에 둔 일이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축조되었고 주위 길이는 약1,300m 높이는 4m 안팎이다.
 

개방시간
월별 여는시간 동물전시 닫는시간
1 ∼ 2
11 ∼ 12
05:00 10:00∼17:00 21:00
3 ∼ 4
9 ∼ 10
05:00 10:00∼18:00 21:00
5 ∼ 6
05:00 10:00∼19:00 21:00
7 ∼ 8 05:00 10:00∼19:00 23:00
공원안내도
공원안내도
1.정문 2.문화관 3, 15, 19.공중전화 4.관풍루 5.사슴사 6.공작사
7.최제우상 8.맹금사 9.침팬지사 10.화장실 11.늑대사 12.물새장
13.시계탑 14.곰사 16.매점,휴게실
17.원앙이사 20.물개사 21.호랑이사
22.달성서씨유허비 24.이상화시비 25.코끼리사 26.원숭이사 27.어린이헌장비 28.사자사
29.잉어장 30.동물진료실 31.이상용구국기념비 32.꽃동산 33.테니스장
34.토성(산책로)
35.주차장 36, 37,38, 41.음수대 39. 허위선생순국기념비 40.향토역사관


달성공원 오는길

달성공원관리사무소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294 - 1번지
전화 : (053) 554 - 7907 ∼8
팩스 : (053) 803 - 5449
 
버스노선 안내
① 큰장네거리1/큰장네거리
  356, 309, 400-1, 402, 405, 420, 425, 508, 521, 623, 653, 724, 급행1

② 큰장네거리2/큰장네거리4
  156, 309, 400, 402, 405, 420-1, 425, 508, 521, 623, 653, 724, 808, 909, 급행1

③ 달성공원 앞
  300, 414-1, 427, 808, 836, 939, 동구2, 북구3

④ 달성공원 건너
  300, 414, 427, 808, 836, 939, 동구2, 북구2, 북구3

⑤ 섬유회관건너 1
  급행1, 급행3, 156, 309, 400-1, 420, 425, 427, 508, 521, 623, 653, 724, 939, 북구3

⑥ 섬유회관 앞
  급행1, 급행3, 156, 309, 323-1, 400, 420-1, 425, 427, 508, 521, 600, 609, 623, 651, 653, 724, 840,
  909, 939, 동구2, 북구3


달성공원 대구에 유일한 동물원이 있는곳? 아마도 그럴것이다. 어릴적 부모님과 함께 가본적이 있는 곳이다. 요즘은 동물을 볼수 있는 곳이 유원지에 가면 볼수가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대구에서는 이곳에서만 볼수 있었기에~~^^
흠.... 산책삼아 공원에 놀러가봐야겠다. 옛추억이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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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  (0) 200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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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대구국제마라톤대회 안내

대구야... | 2009/02/16 20:01 | Posted by 오이군(꼬마미르)
▣ 주 최 : 대구광역시/대한육상경기연맹
▣ 주 관 : 대구광역시 체육회, 대구육상경기연맹
▣ 후 원 : 2011대회조직위원회/대한체육회/대구생활체육협의회/대구지방경찰청
 
참가접수기간 : 2009년 1월 23일부터 ~ 3월 13일 까지
선수집합 : 2009. 4. 12(일) 7시까지
집합장소 : 대구스타디움(대구월드컵경기장)
출발 :
풀코스(엘리트선수,마스터즈) : 오전 8시 00분
10Km : 오전 8시 10분
 
참가자격 : 만18세 이상 신체건강한 남녀로서 참가약관에 동의한 자
참 가 비 : 30,000원
기념품 : 기념품(추후공지), 행사프로그램, 완주메달, 기록증
제한시간 : 5시간
대회코스 : 2011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코스
                    <국제육상경기연맹 공인코스>
 
참가자격 : 신체건강한 남녀로서 참가약관에 동의한 자
참 가 비 : 20,000원
기념품 : 기념품(추후공지), 행사프로그램, 완주메달, 기록증
제한시간 : 1시간 30분
대회코스 : 대한육상경기연맹 측정코스

 
참가부문 : 풀코스 남자, 풀코스 여자
참가신청 : 2009년 3월 11일 ~ 3월 17일, 대한육상경기연맹
번호표 교부일시 및 장소 : 2009년 4월 11일 오전 10시 ~ 오후 3시, 대구스타디움
선수집합 일시 및 장소 : 2009.4.12(일) 07:00 대구스타디움(정문 앞(매표소 입구) 스타트 지점)
경기규칙 : 2009년도 대한육상경기연맹의 경기규칙에 준한다.
특별음료수 제출 : 개인음식물을 제출할 선수는 선수명, 번호 및 지점(Km)
                               을 명기하여 2009년 4월 12일 06:00 ~ 06:30분까지 경기장 본부석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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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연표

대구야... | 2009/02/16 16:16 | Posted by 오이군(꼬마미르)
대구 지역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등의 유물과 유적 등을 살펴볼 때 대략 5천년 전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취락지는 세력확장을 통하여 AD 1세기경 달구불(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로 일컫던 부족국가로 성장하였으며, 그 경계는 지금의 신천에서 성서와 금호강까지로 추정됩니다.
'大丘'라는 이름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주·군· 현의 명칭을 한자명으로 고칠 때 처음 사용되었으며, 이후 조선 정조 4년(1780년)에 '大邱'로 바뀌었습니다.
1601년에는 경상도의 행정, 산업, 군수를 통할하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정치·경제·문화 전분야에 걸쳐 영남지역의 생활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일제침략이 시작되던 1907년 대구의 서상돈이 중심이 되어「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서」란 격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된「국채보상운동」과 1960년 4·19 민주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2·28 학생의거」등은 나라를 위해 중요한 고비마다 빛나는 향도의 역할을 다해 온 대구시민의 긍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1981.7.1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월배·성서·공산지역을 비롯하여 칠곡과 안심, 고산지역을 편입하여 시역이 454.9㎢로 확장된 데 이어 1995. 3. 1 낙동강을 낀 달성군 전역을 편입하면서 시역이 885.6 ㎢로 크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1995. 1. 1 대구광역시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해 7월 1일 민선시정이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지방자치가 실시되었으며, 희망찬 2000년대의 세계적인 「섬유패션도시」, 쾌적하고 푸른「숲의 도시」를 꿈꾸는 250만 시민들이 세계 속의
일류도시로의 힘찬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대구의 연표는 첨부파일을 확인하세요.
자료출처 : 대구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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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역사

대구야... | 2009/02/16 16:14 | Posted by 오이군(꼬마미르)
  고대

우리 고장 대구는 금호강과 그 지류인 신천으로 둘러싸인 기름진 들판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살기 좋은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많이 모여 살면서 이 고장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빗살무늬토기 (신석기시대) 수성구 상동과 서변동에서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가 출토되어,
이 시기부터 대구지역에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구의 청동기 유물은 국보 137호인 비산동의 청동검을 비롯하여, 신천동과 만촌동, 서변동 등 대구지역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타지역의 청동기 유물보다 우수하여 청동기 시대 대구사회의 수준이 다른 지방보다 앞서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 고장에는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해방전까지는 대구역 부근, 달성공원 부근을 비롯 동남쪽으로는 봉산동, 대봉동에서부터 수성들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있었으나, 시가지의 확장으로 인해 지금은 대부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고인돌은 당시 그 많은 고인돌을 만들 수 있었던 세력집단들의 정치 및 사회상과 생활상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삼국시대(三國時代)
금동관 (삼국시대)삼한시대의 대구는 변진 24국 가운데 한 나라로 발전해 왔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으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261년에 달벌성(達伐城)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국에 속한 큰 읍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689년 신라의 도읍을 경주에서 달구벌로 옮기려 한 사실과 신라의 오악(五岳) 가운데 팔공산을 중악(中岳)으로 숭배했던 점 등으로 보아도 그때 당시의 대구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행정체계인 군현체제 아래서 대구는 위화군과 달구화현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757년에는 위화군이 수성군으로, 달구화현이 대구현으로 개명되었습니다.
 
  고려시대(高麗時代)
대구지역은 후삼국의 혼란기에도 신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인식되어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어 역사상 유명한 동수대전의 격전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동수대전은 고려를 세운 왕건과 후백제 견훤과의 싸움입니다. 927년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 오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신라를 도우러 경주로 가던 중 동수(동화사 인근지역)에서 만나 일대 격전을 벌였습니다.신숭겸 장군 유적
이 싸움에서 왕건군은 크게 패하여 왕건의 생명조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때 왕건의 심복장수인 김락의 호위를 받은 신숭겸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으로 위장하고 달아나자 견훤군이 신숭겸을 쫓아 몰려가는 바람에 군졸로 변장한 왕건은 무사히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
왕건은 그 뒤 자신을 대신하여 전사한 신숭겸장군과 김락장군을 위하여 지묘사(智妙寺)를 지어 위로하였는데, 지묘사는 후일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대구에는 왕건에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게 되었습니다. 즉 왕건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는 파군재(破軍재), 왕건의 탈출로를 비추어 주던 새벽달이 빛났던 반야월(半夜月), 왕건이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獨坐巖) 등을 비롯하여 앞산의 은적암(隱蹟庵), 왕정(王井) 등은 이 싸움에서 유래한 지명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초기의 대구지역은 수성군, 대구현, 해안현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대구현은 수성군에 영속되어 있었고, 해안현은 장산군(현 경산)에 영속되어 있었습니다.
1143년(인종21년)에 대구현은 현령관으로 승격되면서 점차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또한 12세기 후반 무신의 난이 일어난 뒤 대구 부근의 청도, 밀양, 경주 등지에서 민란이 빈발하자 대구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활동의 큰 거점이 되었고, 몽고 침입기에는 팔공산 부인사가 대장경판과 더불어 소실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조선이 세워진 후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대구는 농업의 중심지로서 인구가 점차 증가하였으며, 1394년(태조3년)에 대구현이 수성현과 해안현을 영속하여 확장 발전됨에 따라 1419년(세종1년)에는 대구군으로 승격하게 되었습니다.조선시대
그리고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교육활동이 활발해졌으며, 1448년(세종30년)에는 복지제도인 사창(社倉)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험 실시되어 성공하자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창이란 지방 향촌이 공동으로 설치하여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곡식을 모아두었다가 흉년이 들 때나 굶는 자가 있을 때 대여하는 제도)
1466년(세조12년)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어 영남내륙 교통의 요지로서 그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1601년(선조34년)에는 경상도 감영을 대구부에 이전 설치하면서 경산현, 하양현, 화원현을 포괄하는 거대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영남지방의 행정,사법,군무를 통할하는 명실상부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근대(近代)
우리 대구는 갑오개혁(1894년) 때까지 경상도 감영 소재지로서 영남지방의 중추기능을 계속하여 수행해 왔고, 1895년 도(道)제도는 폐지되고 중앙에서 전국 23부(경상도:대구부, 안동부, 진주부, 동래부)를 바로 관할하게 되어 대구부 관할의 대구군으로 개칭되었으나 부청 소재지로서 그 관할구역과 지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근대
1914년에는 다시 부제를 실시했으나 시가지 일대만 대구부로 독립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달성군으로 편제되었습니다.
일제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대구는 항일저항운동의 거점으로서의 역할 수행과 근대적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한 것이었습니다.
1907년에는 대구의 서상돈, 김광제 등이 중심이 되어 일제의 침략으로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금연, 금주, 절미로 되찾으려는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또한 1915년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는 3.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신간회 대구지회가 조직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학생들의 비밀결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민족항쟁의 본거지로서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냈었습니다.
 
  현대(現代)
1945년 광복 이후 대구는 해외 귀환 동포의 정착과 월남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인하여 급격한 인구증가가 이루어져 대도시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현대
1949년에는 대구시로 개칭되었으며 1950년 6.25 동란시에는 낙동강 방어작전의 최후 보루도시로 민주주의를 지킨 역사에 길이 남을 대구 방어전의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대구의 문화예술인은 민족의 애환을 그리는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현대 문화예술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독재가 심화되고 있을 때, 대구지역의 고등학생들은 2.28학생의거를 일으켜 반독재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2.28학생의거는 그 뒤 4.19의거로 연결되어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착에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1981년 달성군의 월배, 성서, 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 등을 편입하여 직할시로 승격하였으며, 1988년는 달서구가 신설되어 7개구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습니다.
1995년 1월에는 지방자치의 완성년도로 중앙정부직할의 시(市) 명칭을 대구광역시로 개칭하여 지방화시대의 원년을 맞이하였고, 1995년 3월에는 달성군을 편입하여 "7개구 1개군"으로 행정구역이 광역화되어 영남권 중추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본선경기를 치르고 2003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개최하는 등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르렀습니다.

출저 : 대구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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